감각과 감성 그리고 현상에 대해서

감각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오감을 통해서 느끼는 것을 “감각”이라고 한다.
외부의 모든 현상들은 감각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감각에 부딪치게 된다.
감각에 부딪친 것이 감성에 작용을 하게 되고, 감성이 본능(행위)을 유발하게 된다.
 
감각과 감성은 感이라는 공통적인 단어를 시용하다.
感이 느낌이다.
느낌도 다양하게 표현되지만 그 근원이 마음이다.
 
감각,감성,감정
감각과 감정은 물질작용이다.
감성은 물질작용과는 다르다는 의미이다.
感性
心通性情
이것을 나누어서 표현하면 “감성과 감정”이 된다.
감성과 감정은 외부의 작용에 의해서 발현되는 것이다.
외부의 작용은 “감각”을 통해서 감성과 감정으로 드러나게 된다.
 
感=느낌
각=객관의 물질이 감각기관에 부딛침(물질)
성=관계?!
정=물질의 작용(인간의 감정은 언어를 통해서도 발현된다)
 
현상이란 무엇인가?
감각에 나타나는 객관이라고 설명해 왔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그렇지는 않다.
감각에 나타나는 객관은 물질일 수밖에 없습니다.
외부의 물질과 인간육체의 감각기관의 부딛침이 있어야 하고, 이것이 감성과 감정으로 나타나게 된다.
외부의 물질과 인간육체의 감각기관이 부딛치기 위한 전제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경험이전에 선험성이 있다고 했다.
경험이 감각을 통한 것이고, 선험성이 “공간과 시간”으로서 “감성”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나는 선험성을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공간과 시간은 칸트와 동일하다.(공간과 시간이 감성은 아니다)
그런데 공간과 시간은 객관으로는 절대이고, 인간(주관)으로는 상대라는 것이다.
여기에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 것이다.
 
현상의 전제 또는 현상이란?
공간과 시간 그리고 마음
공간과 시간의 절대성과 상대성 그리고 마음
여기에 객관의 물질과 인간육체의 오감(감각기관)이 작용을 해서 감성과 감정으로 표현된다는 의미이다.
감성과 령혼이 연관되어 있고, 령혼은 인식작용을 담당한다. 
령혼이 없으면 언어는 불가능하다.
 
의식은 머리달린 짐승에게는 공통된 것이다.(마음은 생명에 공통된 것이다)
머리달린 짐승은 의식이 있기 때문에 공감감각이 있다.
 
마음과 령
공(의식)과 혼
이렇게 연관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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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을 알 수가 있다.
여기에서 “앎”의 문제이다.
앎은 객관이 아니고, 인간주관의 작용이다.
인간주관이 객관을 알 수 있는 한계는 “물질”이라는 것이다.
객관세계에 “신”이 존재하는가?
이러한 것은 인간정신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라는 의미이다.
단지, 객관세계에 대해서는 물질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선험성”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이것이 “앎에 대한 앎”(인간은 어떻게 앎이 가능한가?= 앎의 전제조건)에 대한 물음인 것이다.
이것은 객관세계에서 찿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주관에 대한 검증으로서 이것이 “독일관념론”의 훌륭한 역시적 역할이었다는 것이다.
 
객관세계=현상세계=물질에 대한 앎만 가능하다.
물질에 대한 앎을 넘어서려면 인간주관의 검증이 필요하다.
대상의식=의식이 객관세계로 향해 있다는 의미이다.
자기의식=의식이 자기자신(언어,령혼,시유,신)에게로 향해 있다는 의미이다.
 
대상의식이 감각적 확신-지각-지성의 단계
자기의식이 이성의 단계
 
대상의식은 물질과 연관되어 있고,
자기의식은 신(나)과 연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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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가 개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개체로서의 인간은 객관이라는 세계 안에서 개체들의 연관 속에만 존재할 수가 있다.
실존=연관,인연,관계(실존철학)
실재=개체
이 두개를 합쳐서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주관이 객관으로 나아가려면, 의식이 밖으로 향해서는 안되고, 의식은 자기 안으로 향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때 인간 주관은 객관성(보통 이성의 단계)이라는 통일성을 유지할 수가 있다는 의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