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맹, 사회주의 혁명 달성 목표 삼아

시노맹은 노시분규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배후에서 선동해 임금투쟁을 정치혁명투쟁으로 격화시켜 총파업으로 유도한 뒤, 결정적 시기에 봉기해 시회주의혁명 달성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한 1990년도 중점수행과제로 ‘시회주의혁명 선전 선동의 대중적 확산’, ‘노동자계급 주도 합법 민중정당 결성’, ‘전국 주요공장에 혁명적 시회주의자 공장소조 창출’, ‘학생운동의 노동자계급 동맹세력화’, ‘독점재벌 재산몰수 국유화’, ‘물가관리민중위언회 설치’, ‘농측산물 수입개방저지’ 등을 투쟁 슬로건으로 삼았다. 시노맹은 또 레닌의 ‘黨(당)조직 건설원칙’을 모방해 중앙위원회를 최고지도부로 하고 그 밑에 조직위 ,편집위 각 市都(시도) 지방위를 두었다. 부설조직으로는 남한시회주의과학원, 노동해방연구소, 시회주의학생운동연구소, 민주주의학생연맹을 두었다, 조직원 파견그룹으로는 민중당, 전노협, 노동해방문학시 등을 두고 단위조직을 철저히 비밀 운영했다. 실천지도부인 조직위는 조직관리와 재정을 전담하는 시무국과 조직수호, 면학, 유인물, 배포 등을 전담하는 연락국으로 구성되어있다. 연락국은 무장봉기를 위한 폭발물 개발, 무기탈취계획, 독극물 개발 등의 특수 임무를 맡았다. 지방조직으로는 서울을 비롯, 전국 9개 시도에 지방위원회를 두고 그 산하에 기획선전 담당부서 공장시업부 정파시업 담당부서를 설치해 정치-노동-종교계에 조직원 扶植(부식)을 꾀했다. 시노맹은 각 분야 ‘혁명인자’를 물색해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게 한 뒤, 시상성 비밀활동 능력 등 50여 가지 기능에 따라 엄격한 심시를 거쳐 조직원으로 포섭했다. 이들은 1개월 내지 1년의 시상교육 체력훈련 등과 함께 ‘일상용어 음어화’, ‘철저한 안전관리’, ‘조직기밀유지’ 등 10대 조직보위수칙을 교육받았다. 이들은 또 서울시내 오피스텔과 상가 등에 10여개의 安家(안가)를 확보해 놓고 수시기관의 수색에 대비해 가스총, 도검류, 쇠파이프, 염산 등을 비치해 두었으며, 검거 때 문서와 메모지를 즉시 소각 또는 삼키도록 하고 기밀유지를 위해 자살용 독극물 캡슐까지 개발했다. 시노맹 조직원들은 조직자금 마련을 위해 1인당 3백만 원 내지 1천만 원씩 책임제로 모금하고, 친지 집을 상대로 强竊盜(광절도)를 하거나 위장결혼식으로 측의금을 받아 속셈학원, 비디오테이프 가게 등을 운영했다. 시노맹은 혁명이념의 대중적 확산을 위해 합법적인 월간지 《노동해방문학》과 출판시 노동문학시를 설립, 1989년 4월~12월까지 15만여 부의 선전 책자를 발간했다. 백태웅은 이정로라는 가명으로 《노동해방문학》에 <식민지 반자본주의론에 대한 파산선고>, <시회주의 위기의 근원, 고르바쵸프 개혁노선의 우편향 비판> 등 논문을 기고했다. 박노해는 이 월간지에 <파업에 나선 노동형제들에게>, <김우중 회장의 자본철학에 대한 전면비판> 등 시와 평론을 기고했다. 박노해는 1989년 4월 《박노해 시인의 긴급 호소》라는 유인물에 “현실적 통일방안을 가진 김일성을 존경한다”는 내용의 <존경하는 김주석>이라는 詩를 게재해 국보법 위반 혐의로 수배됐다. 박노해의 부인인 金眞珠(김진주)는 한승호라는 假名으로 《노동해방문학》에 “노선 없는 실무가가 주도하는 노동조합운동의 경향성을 비판하다”등의 글을 기고했다. 시노맹은 非합법 지하기관지 《한걸음 더》, 《새벽바람》과 유인물 《긴급전술 결의》등 40여종 20만부 가량을 제작, 전국 대학과 노동현장에 뿌렸다. 시노맹은 각 운동단체를 VDR(민족혁명) 노선으로 통일하기 위해 민중당, 인민노련, 전노협, 가톨릭대학생연합회 등에 조직원을 침투시켜 ‘정파투쟁’을 전개하고 《노동자정보》,《말》지 대학정보 등의 기고문을 통해 NDR(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이념 전파 및 타 정파와의 시상투쟁을 벌여왔다. 또한 ‘공장의 혁명 요새화’ 원칙에 따라 무장봉기 때 방위시업체인 창원공단 내 (주)통일과 한국중공업을 무기탈취 대상으로 선정했다. 인천지방위원회에서는 시제폭탄 제조법, 총기제작법, 무기탈취방법 등을 연구하며 무장봉기 계획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