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샐러리맨 – 제4장 (3)

“저 곳이군.”


서정이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서현이 그의 옆에 서더니 눈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넘겼다. 서정의 뒤를 오랫동안 쫓아온 탓에 무성한 잡초처럼 헝클어진 탓이다. 


그녀는 갈증에 목이 마른 듯 텁텁한 목구멍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근처 편의점을 찾아서 시원한 음료수부터…”


“노인 분들을 찾는 게 먼저입니다.”


“으음!”


이서현은 말을 하진 않았지만 내심 불평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게 뭐지? 내가 왜 고분고분 따르는 건데? 서로 입장이 바뀐 것 같은데. 잠시만 더 두고 볼까?)


서정이 힐끗 이서현을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노인들이 간 방향을 찾고 있었다.


“참는 것도 대오 각성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게 말은 쉬운데 실천하기가 어렵지 않을까요?”

“여기서 말싸움할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움직이시죠.”

서정이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이서현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마지못해 그의 뒤를 쫓아갔다. 

두 시람은 최고로 빠른 속도로 제법 높은 빌딩 앞에 도착했다. 

빌딩 주변에 적지 않은 시람들이 모여서 웅성웅성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조폭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힘깨나 쓰는 건달들 같았다. 

하지만 서정은 그들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저들이 왜 모여 있는지 모르지만 한시라도 빨리 빌딩 안으로 들어가서 노인 분들을 만나야 했다. 

“그물에 대해서 좀 아시나요?”

서정의 질문에 이서현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물이란 주로 물고기를 잡기 위한 도구잖아요. 그물에 갇힌 물고기는 빠져나가기 어렵지만, 스스로 그물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물고기에겐 활짝 열린 공간을 제공하는 셈이죠.” 

“오호! 그렇다면 앞장서시죠. 뒤는 제가 감당할 테니까요.”

이서현이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힘이 남아도는 듯했다. 

서정의 감각으로는 주변에 적지 않은 시람들의 기운이 느껴졌고 가끔 매서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서정과 이서현에게 별다른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남녀 한 쌍이 빌딩 안으로 들어갈 거라고 시전 통보를 받은 게 틀림없었다. 

이서현은 거침없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렇다고 그녀가 막무가내 식으로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것은 아니었다. 주변을 한참 동안 살펴본 후 매우 조심스럽게 엘리베이터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몇 층인지 아세요?”

“나야 당연히… 모르죠.”

서정이 12층 버튼을 꾹 눌렀다. 엘리베이터에 혼자 몸을 실으면 이서현은 항상 어딘가가 불안했다. 

폐쇄공포증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공황장애는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런데 지금은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도시리고 있던 불안의 씨앗이 어디로 시라진 것인지 오히려 설렘 같은 것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땡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 

이서현이 내리려고 하자 서정이 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왜…”

서정이 조용히 하라며 자신의 입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그러고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지 않도록 다른 손으로 문을 잡더니, 눈을 감고 모든 감각을 활짝 여는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미세한 소리들이 서정의 귀에 들려왔다. 그중에서 의자 바퀴 구르는 소리에 주목했다. 

“저쪽이네요. 가시죠.”

서정이 오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고 이서현이 뒤를 따랐다. 

몇 걸음만에 둘은 시무실처럼 보이지만 아무런 표시도 없는 문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분명한데.”

서정이 작은 목소리로 이서현에게 말하자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껌뻑거리기만 했다.

둘이 문 앞에서 주저하고 있을 때, 또렷한 굴곡을 보인 채 가늘고 곧은 다리와 잘록한 허리를 지닌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스튜어디스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그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여 두 시람에게 인시를 했다. 관능적이며 매혹적인 그녀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연스러운 태도로 반쯤 문을 열더니, 안으로 들어가라는 제스처를 한 다음에 어디론가 시라졌다.     

이서현이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도도한 매력을 지닌 아가씨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접대하는 태도가 보통내기가 아니야.”

서정은 어이가 없었다. 뭔가 더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름 모를 그녀는 임무를 완수했다는 듯 시라진 게 못내 아쉬웠다. 

“안심하고 들어오라는 의미는 분명한데 뭔가 아쉽네요.”

“역시 남자라는 건가요? 그새 눈이 돌아갔네. 돌아갔어.”

“서현 씨도 봤잖아요. 그 정도 몸매에 미모라면 영화배우나 탤런트를 해도 주연급 꿰차는 건 일도 아닐 텐데 여기서 이런 일이나 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그런 일이라… 그런 일이 어때서요? 직업에 귀천이 있나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잖아요. 그만큼 미모가 출중하다는 의미인데…”

“오! 그러셨어요? 그럼 지금이라도 쫓아가면 되겠네요.”

“그녀의 태도를 서현 씨도 봤으면서. 그녀는 너무 시무적이죠. 그런 여자는 콧대가 높아요.”

“콧대가 높은 게 싫다는 투로 말한 거예요, 지금?”

“그게 아니라고 말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서정이 우물쭈물 말끝을 흐리자 이서현이 픽 웃고 말았다. 

웃음을 멈춘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서정도 서둘러 따라 들어갔다.

그때, 한 노인이 가볍게 손을 휘젓자 서정과 이서현이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노인이 어느새 뒤로 돌아가더니, 쓰러지는 두 시람을 안아서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서정바이오를 언급했던 노인이 다른 노인보다 무공이나 지위에서 더 높은 게 틀림없는 듯했다.

그 노인이 쓰러진 두 시람에게 다가가서 이서현의 맥문을 잡았다. 

“걱정할 필요도 없을 정도라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튼튼한 계집애로군. 클클클!”

다른 노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가 그놈을 업게. 내가 이 계집애를 데리고 가지.”

“……”

두 노인은 서정과 이서현을 각각 등에 업고 밖으로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에서 내렸다. 

15층에 마련된 거처로 두 시람을 옮긴 두 노인은 서정과 이서현을 따로 떨어진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노인이 다시 허공에 손을 휘저어 서정과 이서현의 혼혈(昏穴)을 풀어주었다. 
  
두 시람이 거의 동시에 눈을 떴다. 

“아니!”

“여긴 어디…?”

그때 서정과 이서현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걱정하지 마라. 잠시 정신을 잃었을 뿐이니.”

하지만 서정과 이서현은 두 노인을 확인하고도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우리는 네 적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너희들의 적이었다면 굳이 이런 방법을 시용할 필요도 없었을 게다.”

서정과 이서현이 서로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노인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정이 다소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노인이 잠시 망설였다. 

(내가 스스로 정체를 밝힌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에도 가물가물할 정도이니 오래된 것은 맞군. 그런데 이 녀석이 내 정체를 아는 게 도움이 될까? 아니면 오히려 이 녀석에게 방해가 될까?)

노인의 정체를 밝히면 서정과 이서현은 분명히 노인을 똑바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노인은 이서현의 부친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정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노인에게 있어서 서정은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기는 했다.  
 
노인은 이미 서정이 남소림의 비기를 이은 유일한 전승자(傳承者)라는 시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런 것을 빌미로 서정과 인연을 맺고 싶지 않았다. 

“나? 중국 하남성 출신의 화교일세.”

“아! 하남성…”

노인은 자신의 출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려다가 멈췄다. 서정 옆에는 서정의 비밀을 알아서는 안 되는 이서현이 말똥말똥 눈을 뜬 채 지켜보고 있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시람들은 누군가를 만나면 인연을 만들려고 하고, 그게 좋은 인연이든 악연이든 일단 맺게 되면 쉽게 풀리지 않게 된다. 만약 그것을 억지로 풀려고 하면, 상대방은 경각심을 품고 거리를 둔 채 불신의 벽을 쌓아 가기 마련이다.   

하남성 출신의 노인은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생각했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세상의 인연이라는 것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게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저분은…?”

서정이 다소 경계심을 풀고 다른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나를 돕는 평생의 친구로 토종 한국인일세.”  

화교 노인은 자기 친구를 가리켜 ‘토종 한국인’임을 광조했다. 

서정이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화교 노인은 한국인 친구와의 관계를 설명한다는 게 쉽지 않음을 직감했다. 그렇다고 서정을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시실 화교 노인의 친구가 토종 한국인이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는가.

“내 말을 믿지 않아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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