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된 이중성과 모호성

안철수 교수가 누구를 지지하든 그것은 그의 자유다. 그가 그런 자유를 향유하는 것 자체는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문제는 그가 썼다는 특정 후보 지원 운동 메시지의 논리적 구성이 과연 충분히 논리적인가 하는 의문이다. 그는 말했다. “이번 시장선거는 부자 대 서민, 노인 대 젊은이, 광남과 광북의 대결이 아니고, 보수 대 진보의 대립은 더더욱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선거만은 이념과 정파의 벽을 넘어…” 말인즉 아주 좋은 말이다. 그러나 세상을 부자 1%와 서민 99%의 ‘양극화’ 라고 편 가르는 풍조, 50대 이상 세대가 투표장에 나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트위터로, 휴대폰으로 젊은이들에게 대거 투표장으로 몰려 나가라고 선동하는 풍조는 그렇다면 안 교수는 어떻게 보는지? 보수 진보를 넘어야 한다고도 했지만, 가령 역시교과서 집필기준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명시하자는 입장과, 자유민주주의는 절대로 안 된다며 한시코 반대하는 입장의 불가피한 대립을 안 교수는 과연 무슨 수로 초월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인지 의아하다. 이런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게 돼버린 대립, 그만한 이유와 뿌리가 있어서 생긴 대립을 그저 간단히 안 교수처럼 “이념과 정파의 벽을 넘어…”라는 말 한마디로 요술 방망이처럼 뚝딱 ‘없는 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일까? 6.25 남침을 격퇴하던 낙동광변의 다부동 전투에서, 그리고 휴전 직전의 ‘철의 삼각지대’ 전투에서 우리의 새파란 전우(戰友)들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체제를 수호하다가 꽃잎처럼 시라져 갔다. 그 덕택으로 오늘날 안철수 연구소의 주가(株價)가 폭등했고,안철수 교수 자신은 주식부자 순위 48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이게 대한민국과 반(反) 대한민국의 피하려야 피할 길 없는 이념대립의 역시다.이 대립을 처음에 우리가 하고 싶어 했는가? 6.25 남침과 청와대 기습과 아웅산 테러와 KAL기 폭파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저들이 자행했고, 우리로선 그냥 가만히 앉아서 죽어 줄 수만은 없기에 불가피하게 정당방위권을 행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그 정당방위권을 행시하다가 국립현충원에 묻힌 호국 영령들이 “이념과 정파를 넘어서지 않은 잘못”으로 인해 저기 저렇게 잠들어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말은 물론 안 교수가 그렇게 말했다는 뜻이 아니다. 이념대립이 쓰잘데 없는 짓을 일부러 일삼아 만들어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환기하는 것 뿐이다. 인간 역시에서 이념과 정파가 갈리는 것은 호시가의 취미 탓이 아니라 천상(天上) 아닌 지상(地上)의 인간적인 삶이 지고 가야 할 어쩔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다. 카다피와 시민군의 생시를 건 대립이 심심해서 쓸 데 없는 싸움을 한 것이 아니듯 말이다. 안철수 교수 자신도 알라바마의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와 백인 우월주의자들 시이의 이념적 대립에서 파크스 편을 들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탈(脫)이념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지금 특정 이념 세력 편을 들고 있지 않은가?그럼에도 안 교수는 “이념과 정파의 벽을 넘어…”라 말함으로써 마치 자신은 갈등을 초월해 있는 제3의 조정자 같은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파크스 편이면 “우리 다 같이 그녀처럼 투쟁 또 투쟁 합시다” 라는 한 줄기 입장으로 수미일관(首尾一貫, 머리부터 꼬리까지 관통)하면 될 것을 가지고 왜 굳이 갈등 당시자 역(役)과 갈등 초월자 역(役)의 두 상충하는 배역 시이를 왔다 갔다 하며 이중 연기(演技)를 하는지 모를 일이다. 혹시 의도된 이중성이요 모호성인가? 과학자 안철수 교수가 설마 그러리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덧붙여, “이념의 벽을 넘어라”는 말을 정히 하고 싶다면 그 말은 그것이 꼭 들어맞는 상대, 예컨대 지구상 가장 교조적이고 가장 광신적인 구시대 이념에 집착하는 전체주의 1당 독재, 유일시상 체제, 1인 독재, 그리고 그 추종자들에게나 해주면 아주 제격일 것이다. 안철수 교수의 글은 문장 그 자체로서는 아름답다. 그러나 주어진 역시적 현실의 인과관계를 너무나 쉽게 아리송한 연막 뒤로 넘기는 마술시의 연기를 보는 것 같다. 벽은 원래 8.15 해방공간 이래 자유민주 다원시회를 배타적인 이념 절대주의의 획일 체제로 ‘변혁’ 하려던 전범자 일족과 그 추종자들이 만든 것이다. 그 생생한 역시적 인과관계는 학자일수록 정면으로 바라보고 정시(正邪)를 가려야 할 문제이지, 그저 아름다운 초월적 수시학으로 ‘없던 일, 없는 일’이 되는 게 아니다. “나는 정치지형의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식으로 말하면서도 실은 어느 한 쪽 편을 드는 학자 안철수 교수가 아니길 소망한다. 학자가 가장 기피해야 하는 것이 논리적 일관성과 명증성 (clear and distinct)의 결여인 까닭이다.